토미 존 — 자신의 이름보다 더 많은 커리어를 살린 투수
288승보다 더 오래 남은 이름, 야구가 팔꿈치 부상을 마지막 장으로만 쓰지 않게 만든 사람
토미 존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그의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먼저 떠올리는 것은 투구폼도 특정 경기의 장면도 아니다. 수술이다. 토미 존 수술.
야구 역사상 자신의 이름이 의학적 용어로 굳어진 선수는 거의 없다. 그리고 그 수술이 수천 명의 선수에게 다시 공을 던질 기회를 줬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토미 존이라는 이름이 야구에 남긴 흔적은 단순한 선수 한 명의 커리어보다 훨씬 크다.
그는 26시즌 동안 288승을 올렸고 네 차례 올스타에 선정됐다. 하지만 결국 그의 가장 큰 유산은 승수나 기록표 밖에 남았다. 그가 한 번 자신의 팔꿈치를 걸었기 때문에 이후 수많은 투수들은 커리어 전체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1974년 당시 토미 존은 LA 다저스의 선발투수였다. 31세,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넘게 던진 투수였다. 그해 팔꿈치 안쪽의 척측측부인대, UCL이 심하게 손상됐다.
지금이라면 익숙한 진단이지만 그때는 사실상 커리어 종료에 가까웠다. 투수의 팔꿈치 안쪽 인대가 끊어지면 다시 정상적으로 공을 던질 방법이 거의 없었다.
다저스 팀 닥터 프랭크 조브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손상된 인대를 제거하고 다른 부위의 힘줄을 이식해 새 인대를 만든다. 지금 보면 익숙한 설명이지만 당시 야구선수에게 이런 수술을 한 사례는 없었다.
수술을 만든 사람은 조브였다. 하지만 새로운 수술은 환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특히 프로 스포츠에서는 커리어와 몸 전체를 걸어야 한다. 복귀 가능성도, 재활 기간도, 예전처럼 던질 수 있을지도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토미 존은 선택했다. 1974년 9월 수술을 받았고 1975년 시즌 전체를 재활에 썼다. 그리고 1976년 다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이 순간부터 야구의 기준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복귀만 해도 성공이었다. 그런데 토미 존은 단순히 복귀한 수준이 아니었다. 수술 이후 14시즌을 더 뛰었고 164승을 올렸다. 수술 전 124승보다 많았다.
1977년에는 20승7패, 평균자책점 2.78을 기록하며 다저스를 월드시리즈까지 이끌었다. 이후 양키스로 가서도 20승 시즌을 만들었고 결국 46세까지 던졌다.
26시즌, 288승, 700경기 선발. 이 숫자만 놓고 봐도 하나의 긴 커리어다. 그런데 이 커리어는 사실 두 개로 나뉜다. 수술 전과 수술 후. 그리고 놀랍게도 두 번째 커리어가 첫 번째보다 길었다.
처음에는 공식 명칭이 따로 있었다. 척측측부인대 재건술, UCL reconstruction. 하지만 야구에서는 곧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토미 존 수술.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처음이었고, 성공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복귀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의 이름은 수술명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이후에는 하나의 가능성이 됐다. 그리고 결국 표준 치료가 됐다. 현대 야구에서 UCL 파열 진단은 여전히 심각하지만 더 이상 자동으로 커리어 종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익숙해졌다. 'UCL 손상', '토미 존 수술 결정', '다음 시즌 복귀 예상'. 어느 순간 투수가 정기적으로 받는 정비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작은 수술이 아니다.
팔꿈치를 열고 다른 부위의 힘줄을 가져와 새 인대를 만들고, 그 뒤 1년 이상 재활한다. 1980년대만 해도 경이적인 일이었고 지금은 일정표를 계산하는 일이 됐다. 이 변화의 출발점에 토미 존이 있었다.
여기에는 독특한 역설이 있다. 토미 존은 위대한 투수였다. 288승, 2,245탈삼진, 46세까지 현역, 네 차례 올스타, 26시즌.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성적보다 수술을 먼저 기억한다.
그는 생전에도 자신이 쿠퍼스타운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의료 역사 때문이 아니라 선수로서의 커리어라고 강조했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선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수술 이야기만으로 끝내는 것도 공평하지 않다. 그는 단순한 의학사의 환자가 아니라 26년을 메이저리그에서 버틴 선발투수였다.
그는 빠른 공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투수가 아니었다. 땅볼을 만들고, 경기를 길게 끌고 가고, 타자의 타이밍을 흔들었다. 무엇보다 오래 던졌다. 야구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했다. 계속 마운드에 올라갔다.
토미 존은 결국 선수로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했다. 288승, 26시즌, 네 차례 올스타, 수술 이후 164승. 전성기의 압도적인 피크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야구 자체를 바꾼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정확해야 할 것도 있다. 토미 존이 수술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 공은 프랭크 조브에게 돌아가야 한다. 조브가 방법을 만들었고 존이 가능성을 증명했다.
한 명이 없었다면 다른 한 명의 업적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의사와 선수, 두 사람의 신뢰가 하나의 스포츠 의학 혁명을 만들었다.
이후 수많은 투수가 같은 수술을 받았다. 선발, 불펜, 유망주, 사이영상급 에이스.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선택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1974년 이전에는 끝이었다. 1974년 이후에는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언제 돌아올까'를 묻는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토미 존 수술의 성공은 야구에 또 다른 역설도 만들었다. 수술 성공률이 높아지고 재활 프로토콜이 정교해지면서 부상 자체를 바라보는 심리가 달라졌다. 끝나는 부상이라는 공포가 줄었다.
하지만 수술은 안전망이지 업그레이드 버튼이 아니다. 목적은 망가진 팔을 더 좋은 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던질 수 있는 팔로 만드는 것이다.
토미 존 자신도 재활을 서두르지 말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빨리 돌아오는 것보다 다시 수술하지 않을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지금 더 의미가 있다.
선수가 은퇴하면 이름은 점점 과거형이 된다. 세대가 바뀌고 기록이 깨지고 영상을 직접 본 팬도 줄어든다. 하지만 토미 존은 달랐다. 그가 은퇴한 뒤에도 매년 그의 이름이 불렸다.
신인 투수가 받았다. 사이영상 투수가 받았다. 유망주가 받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선수는 은퇴했는데 이름은 매 시즌 로스터에 남아 있었다. 이보다 이상한 스포츠 유산도 드물다.
토미 존이 수술을 받을 때는 혼자였다. 비교할 선수도, 성공 사례도, 재활 참고서도 없었다. 50년 뒤에는 수천 명의 선수들이 같은 경로를 걷고 각 팀에는 전문 의료진과 재활 데이터, 투구 프로그램이 있다.
그래서 그의 수술 후 164승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단순한 개인 기록이 아니라 증거였다. 이 수술을 받고도 돌아올 수 있고, 선발투수로 뛸 수 있고, 20승을 할 수 있고, 월드시리즈에 갈 수 있고, 40대까지 던질 수 있다는 증거였다.
어떤 선수는 기록을 남기고 어떤 선수는 우승을 남긴다. 토미 존은 다른 것을 남겼다. 선수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는 의사가 아니었고 연구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으로 하나의 질문에 답했다. 망가진 투수의 팔은 다시 메이저리그에서 던질 수 있는가. 답은 가능했다.
토미 존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내년에도 그의 이름은 들릴 것이다. 그다음 해에도 들릴 것이다. 어떤 젊은 투수가 팔꿈치를 다치면 다시 나오고, 어떤 에이스가 수술을 결정하면 다시 나온다.
처음에는 한 선수의 이름이었다. 나중에는 하나의 수술 이름이 됐고, 결국 야구의 언어가 됐다.
토미 존은 288승을 올린 좋은 투수였고 26년을 버틴 위대한 베테랑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됐다. 그의 이름을 가진 수술 덕분에 수많은 선수에게 두 번째 커리어가 생겼다.
그 승리 가운데 대부분은 그의 기록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승리의 시작점에는 1974년 자신의 팔꿈치와 커리어를 걸었던 한 투수가 있었다. 토미 존. 자신의 이름보다 더 많은 커리어를 살린 투수다.
핵심 정리
- 토미 존은 26시즌 288승을 기록한 장수 선발투수였다.
- 1974년 프랭크 조브의 UCL 재건술을 받은 뒤 수술 후에만 164승을 더 올렸다.
- 그의 가장 큰 유산은 팔꿈치 부상이 더 이상 자동적인 커리어 종료를 뜻하지 않게 된 변화다.